아호는 파하(波荷) 또는 월강(月江). 경상남도 마산 출생. 아버지는 치상(致相)이며, 어머니는 이복순(李福順)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인천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김에 따라 인천에서 영화학교(永和學校)를 마쳤다. 1916년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공부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8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의 기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발각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그 뒤 출감하여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 체육기자로 활약하였다. 1923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전담, 주관하였다. 한때는 심판을 보기도 하였으며, 1932년에는 『신동아』에 「여자정구 10년사」를 연재하였다.
1924년 11월 조선체육회 실무위원이 되었으며, 1925년 제1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임원, 전조선중학교 농구선수권대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24년 조선일보로 이적했다가 1927년송진우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동아일보로 다시 돌아와 체육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뜻을 모아 1927년 8월서울영금정(令今亭)에서 조선운동기자단(朝鮮運動記者團)을 조직하여 운동경기의 전문화에 기여하였다.
1932년 8월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金恩培)와 권태하(權泰夏) 선수가 골인하는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없애 버렸고, 1936년 8월『동아일보』에 「名譽의 우리 孫君 世界制覇의 凱歌」라는 제목 아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도 일장기를 없앴으며, 『신동아』에 실린 사진에도 일장기가 지워졌다. 이 사건으로 사직당하고 『동아일보』는 정간되었으며, 『신동아』는 폐간되었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고 광복이 되자 조선체육동지회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결과 조선체육회(현재 대한체육회)를 부활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45년 조선체육회 상무이사로 선임되었고, 이듬해『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서울특별시 고문,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국민당 중앙당 상임위원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9년 10월 대한체육회 공로상을 받았으며, 체육사를 정리하여 『체육연감』과 『대한체육사』가 발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