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언(帶彦). 이겸저(李謙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李淨)이다. 아버지는 이명식(李命植)이며, 어머니는 심득현(沈得賢)의 딸이다.
1787년(정조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5점을 받고, 이어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2차 인사기록)에 6점을 받았다.
그 해에 교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관서암행어사가 되어 수령들의 죄를 성토하는 서계(書啓: 임금의 명령을 받든 관리의 복명서)를 올렸다. 1792년(정조 16)에는 형조참의로 있으면서 직무태만의 죄로 금갑도(金甲島)에 귀양을 갔으나, 한 달만에 사면되어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2년 후 승지가 되었다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1796년(정조 20)에 비변사제조가 되었다가 다시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799년(정조 23)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01년(순조 1)에 창성부(昌城府)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순조 5)에 풀려나서 이조참판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사사로운 의리를 대며 출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전주부(全州府)에 정배되었다. 그러나 한 달만에 풀려나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1808년(순조 8)에 호조참판·한성부판윤·공조판서·대사헌을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전라감사 때에는 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을 송환시켰다. 1810년(순조 10)에 우참찬·대사헌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판윤이 되었다. 1812년(순조 12)에 호조판서·대사헌이 되었다가 그 해에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