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백(致伯), 호는 안호(安湖). 진주(晉州) 출신. 정종의 열째아들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13대손이며, 이집(李𠍱)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기항(李基恒)이고, 아버지는 이완길(李完吉)이며, 어머니는 박세현(朴世炫)의 딸이다.
1838년(헌종 4) 알성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휘릉별검·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다. 홍문관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858년(철종 9)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고 있었다.
1862년 진주민란 주동자 유계춘(柳繼春)이 이명윤이 동향인인 데다 문관조사(文官朝士)로서 지방민의 존경을 받고 있으므로 마치 이 민란의 배후지도자인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자, 도회(都會: 유림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 이명윤을 미워하던 향리들에 의해 민란의 주모자로 무고당하였다.
안핵사 박규수(朴珪壽)가 현지에서, 첫째 초군(樵軍)이 진주 읍내에 진입할 때 이명윤도 읍내에 들어갔고, 둘째 초군이 읍내에 들어갈 때 일반 양반들에게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해 도로에 내왕조차 할 수가 없었으나 이명윤에게만은 일제히 길을 열어주어 경의를 표했고, 셋째 초군들이 일반 양반이나 이서(吏胥)들의 가옥은 습격해 파괴했으나 이명윤의 집만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보고함에 따라 주동자로 몰려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의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이에 『피무사실(被誣事實)』을 적어 자신이 무고를 입은 원통한 사실을 피력하고는 날마다 산에 올라가서 서울이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특사명(特赦命)이 도착하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