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과암(果菴). 내자시정 이지번(李之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이다. 아버지는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4대째 호당(湖堂)을 배출한 명문 집안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죽은 김첨(金瞻)의 딸이다.
1629년(인조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디딘 뒤, 1641년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지평(持平)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듬해 정언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지평직을 수행하였다.
1646년에는 사헌부지평으로 재직하던 중, 병을 칭하며 사직소를 올려 태자(太子) 보익(輔翼)에 대한 문제와 언로(言路)의 개방 등에 대한 시폐(時弊)를 간곡히 진달, 인조의 신임을 얻었고, 이어 정언으로 재발탁되었다.
지론(持論)이 항상 올바르고 귀감이 되어 당시 명류(名流)로서 자못 명성이 있었다. 그 뒤 호서(湖西) 지방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붕당(朋黨)의 화와 어진 수령의 선택 등에 대한 상소와 아울러 재차 사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인조대에 정언과 지평 등을 여러 차례 교대로 수행하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뒤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 조경과 함께 언로의 막힘을 걱정하며 체차(遞差: 관직을 교체함)를 청하기도 했다.
이어 대간이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려는데, 정언(正言)으로서 인피하고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경직으로 복귀했으나, 1652년(효종 3) 지평을 거쳐, 다시 외직인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보임되었다. 1656년 이후에는 필선·헌납·집의·사간·보덕 등 세자시강원과 사헌부 및 사간원에서 줄곧 근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