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눌(伯訥), 호는 풍서(豊墅) 또는 상와(常窩). 생부는 이양신(李亮臣)이고, 양부는 이숭신(李崇臣)이다.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이희조(李喜朝)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시강원의 동궁요속(東宮僚屬)에 임명되었고, 장악원정을 거쳐 1788년 동부승지에 특배되었으며, 1790년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1791년 공조판서로서 장악원제조를 겸임하면서 『용비어천가』 · 『악학궤범』 등의 종묘악장(宗廟樂章)을 분류,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1791년 조흘강시관(照訖講試官)으로 임명된 윤영희(尹永僖)가 시험에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혐의로 의금부에 하옥되었을 때, 의금부당상으로서 치죄를 잘못하였다 하여 파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형조판서로 기용되어 내직에 임명되었다.
도총관을 거쳐 1795년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음관(蔭官)으로서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것은 조선 초의 황희(黃喜)의 아들 황수신(黃守身)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 뒤 노인직으로 판돈녕부사 · 판중추부사의 자리에 있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저서로는 『풍서집』 18권과 노론의 시각에서 당쟁을 논한 『충역변(忠逆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