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초명은 정현좌(鄭賢佐). 자는 거비(去非). 정배걸(鄭倍傑)의 7대손으로, 정신(鄭愼)의 아들이다.
1273년(원종 14)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선임되었고, 충렬왕 때 이부총랑(吏部摠郎)·병부총랑(兵部摠郎)을 거쳐 세 고을에서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뒤 우상시지내지(右常侍知內旨)가 되었는데, 정직하다는 평판이 높아 재초도감(齋醮都監)을 관장하게 하였다. 1301년(충렬왕 27)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여 이봉룡(李鳳龍) 등 77명을 선발하였고, 다음 해 조간(趙簡) 등과 함께 국학박사에게 행하는 경서 시험을 주관하였다.
1303년 오잠(吳潛)이 원나라에 대하여 충렬왕·충선왕 부자를 이간질하여 폐해를 끼치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원나라의 사자(使者)에게 상서하여 물리치기를 청하였다. 1313년(충숙왕 즉위년)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치사(致仕)하였다. 말년에는 불교를 독실히 믿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