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서자이다. 1646년(인조 24) 아버지가 진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 곳에 따라가 아버지로부터 『서경(書經)』의 선기옥형(璿璣玉衡 : 해시계)과 혼천의법(渾天儀法) 등을 배워 천문의기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자격루(自擊漏)·혼천시계 등을 만들어 아버지를 위로하면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던 그는 1648년 전력부위(展力副尉)라는 종9품의 잡직으로 벼슬길에 올랐지만, 말단 벼슬을 탓하지 않고 오직 과학하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찾으려 하였다.
1664년(현종 5) 왕명으로 관상감에 들어가 송이영(宋以穎)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누국(漏局)의 천문시계들을 개조하여 1666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크게 승진, 이때부터 과학자로서의 위치가 뚜렷해졌다.
1669년에는 세종 이래의 전통을 계승한 새로운 수격식(水激式) 선기옥형을 제작하였는데, 이 천문시계에는 사유옥형(四遊玉衡) 대신 지구의(地球儀)를 남북의 두 극축(極軸)에 연결하여 혼천의의 중심에 넣음으로써 지전설(地轉說)을 입증하였다.
이 천문시계는 송이영이 만든 추동식(錘動式) 기계장치의 천문시계와 함께 조선과학사의 뚜렷한 업적으로 남았다. 이 공로로 1674년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680년(숙종 6)에 이주첨사(伊州僉使)·이성현감(利城縣監)·영월군수·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687년에는 현종대에 만들었던 선기옥형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 시작하여 그 다음 해 5월에 완성,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남쪽에 제정각(齊政閣)을 지어 이를 설치하였다. 또한, 1683년에는 성능이 좋은 수차를 만들어 관개에 이용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