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차 ()

임원경제지 / 수전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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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물품
조선시대, 수레바퀴나 톱니바퀴 등의 부품을 이용해 농지에 물을 효율적으로 대는 용도로 개발하여 널리 보급하려던 관개용 양수기.
이칭
이칭
무자위
물품
재질
목재 등
용도
관개용 양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수차는 조선시대 수레바퀴나 톱니바퀴 등의 부품을 이용해 농지에 물을 효율적으로 대는 용도로 개발하여 널리 보급하려던 관개용 양수기이다. 『왕정농서』에 나오는 괄차, 번차, 통차와 『태서수법』에 나오는 용미차, 옥형차, 항승차 등이 있다. 중국에서 널리 쓰던 번차[당수차]와 일본에서 널리 쓰던 통차[왜수차]를 보급하려던 시도가 고려 말부터 줄곧 있었지만, 실제 관개용으로 활용하는 데 이르지는 못하였다. 자연조건이 수차를 이용하기 유리한 중국과 일본의 논농사 지역에 비해, 조선에서 수차를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의
조선시대, 수레바퀴나 톱니바퀴 등의 부품을 이용해 농지에 물을 효율적으로 대는 용도로 개발하여 널리 보급하려던 관개용 양수기.
형태와 제작 방식

구조와 원리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농지에 물을 대던 양수기는 다양하였다.

원시적인 것으로는 호두(戽斗), 길고(桔槹), 녹로(轆轤) 등이 있다. 호두는 원통형의 두레박에 줄을 달아 두 명이 물을 퍼 올리는 맞두레와 긴 두레박을 지지대에 매달고 한 사람이 발로 밟아 물을 퍼 올리는 용두레가 있는데, 오래전부터 우리 농촌에서 농부들이 흔히 사용하던 것이었다. 길고는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우물이나 웅덩이의 깊은 물을 퍼 올리는 것으로 『장자(莊子)』에서 자공(子貢)이 농부에게 효율적인 양수기라며 알려주려고 하였던 것으로 유명한 양수 기구이다. 녹로는 드럼에 두레박 줄을 감아 드럼을 돌리며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 항아리를 퍼 올릴 수 있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시적인 양수 기구들은 보통 수차로 불리지 않았다.

수차라 하면 바퀴 모양의 둥그런 틀, 스크루[나사 모양의 원통], 실린더, 그리고 지렛대 등을 이용해 좀 더 효율적으로 물을 퍼 올릴 수 있도록 개발된 양수기를 말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써오던 수차들은 크게 나누어 괄차(刮車), 번차(翻車), 통차(筒車)를 들 수 있다. 중국 원나라 때의 농서인 『왕정농서(王禎農書)』[1313년]에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괄차는 괄수판이 달린 1~2m 남짓 크기의 수레바퀴를 손이나 발로 돌려 물을 퍼 올리는 구조다. 중국에서는 사용이 매우 적었던 것 같지만, 일본에서는 17세기에 발로 밟아 돌리는 ‘답차(踏車)’로 개발되어 논농사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 또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한국 농촌이나 염전에서 널리 사용되던 ‘ 무자위’가 바로 이 답차였다.

번차는 용골판 판때기를 체인으로 연결해 긴 홈통 속에서 끌어올려 물을 퍼 올리는 구조로, ‘용골차(龍骨車)’로도 불렸다. 중국에서는 23세기경부터 개발되어 널리 사용되었는데, 경사가 24°일 때 가장 효율적이며, 4.65m까지 물을 퍼 올릴 수 있었다. 보통의 번차는 14인이 발로 밟아 작동하지만, 축력이나 수력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2개 이상의 톱니바퀴를 연결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다.

통차는 거대한 크기의 바퀴에 물통을 달아, 흐르는 물의 힘으로 바퀴를 돌려, 물을 퍼 올리는 구조이다. 수력을 이용해야 하므로 물살이 센 곳에서 사용할 수 있지만, 2개의 톱니바퀴를 추가로 연결해 축력으로 작동하는 구조로 개발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14세기 이후에 간간이 사용된 듯한데, 일본에서는 이보다 일찍 13세기부터 통차가 개발되어 널리 사용된 듯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통차로 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에 있는 ‘삼련수차(三連水車)’를 들 수 있다.

서양식 수차로는 용미차(龍尾車), 옥형차(玉衡車), 항승차(恒升車)를 들 수 있다. 예수회 선교사 사바티노 드 우르시스(Sabbathino de Ursis: 1575~1620)[중국명은 웅삼발(熊三拔)]가 1612년(광해군 4) 편찬한 『태서수법(泰西水法)』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용미차는 아르키메데스의 나선형 스크루를 이용한 것으로 매우 효율적이나 정밀해야 하므로 동아시아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옥형차는 2개의 실린더와 피스톤을 이용한 압축식 펌프로, 기원전 헬레니즘 시기에 처음 발명되었지만, 16세기 중반 무렵 이후에 개량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1627년(인조 5)에 예수회 선교사 테렌즈가 편찬한 『기기도설(奇器圖說)』에 수록된 불을 끄는 소화기(消火器)인 ‘수총차(水銃車)’가 같은 원리와 유사한 구조를 지녔다. 이 수총차는 1723(경종 3) 허원(許遠)이 북경에서 들여온 이래, 군문에서 제작해 두고 소화기로 사용하였으며, 1744년(영조 20) 이후에는 왕릉에 물을 대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소화기인 수총차는 ‘수차’로도 사료에 나오나, 양수기는 아니다.

항승차는 1개의 실린더와 피스톤을 이용한 흡입식 펌프이다. 우리네 주택에서 흔하게 보던 우물물을 퍼 올리던 펌프가 바로 이 항승차와 같다.

변천 및 현황

수차 보급의 역사

한국의 역사에서 수차는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까지는 원시적인 양수기인 맞두레와 용두레가 유일하였다. 18세기 말 박지원(朴趾源)은 중국에서는 1,000년 전부터 사용하던 수차를 조선에서는 아직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탄하였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수차를 보급하려던 시도는 계속 있어 왔다.

먼저 중국과 일본 현지에서 널리 사용되던 수차를 보급하려던 시도들은 고려 말부터 있었다. 일찍이 고려 공민왕 때 1362년(공민왕 11)에 백문보(白文寶)가 중국 양쯔강과 회수 유역에서 널리 사용되던 수차를 보급하자고 주장하였다. 조선 성종 때에는 1488년(성종 19) 최부(崔溥)가 표류 후 중국 소흥 지역에서 수차를 보고 와 소개하였다. 명종 때인 1546년(명종 1)에는 제주도 어부 12인이 표류 후 중국 푸젠성에서 수차를 보고 와 전해주었다. 효종 때 1650년(효종 1)에는 즉위 전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북경과 심양을 오가며 본 수차를 즉위 후 관개용으로 만들어 보급하려고 하였다. 정부에서 수차 10여 대를 만들어 지방에 내려보내고, 똑같이 만들어 사용할 것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보고 온 수차는 번차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수차(唐水車)’로 불렸다.

일본식 수차인 ‘왜수차’, 즉 통차의 보급 시도도 있었다. 세종 때인 1429년(세종 11)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서 수차를 보고 배워와 제작해 보급하려고 하였다. 1434년(세종 16)에는 수차 보급을 독려하고자 ‘수차경차관(水車敬差官)’을 파견해 수차의 제작과 사용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널리 보급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광해군과 숙종 때에도 일본식 통차를 보급하려 하였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번차[당수차]와 통차[왜수차]가 현지에서 보고 배워온 수차라면, 18세기부터는 수차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등장하였다. 모두 『왕정농서』[1313년]와 『태서수법』[1612년]에 소개된 수차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었다. 조선 후기의 많은 실학자들이 이 책들에 적힌 수차 지식을 소개하면서 제작해 널리 보급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경준(申景濬)은 과거 시험 답안인 「차제책」[1754년]에서 번차, 통차, 용미차, 옥형차, 항승차를 소개하며 보급하자고 주장하였다. 서명응(徐命膺)은 그의 농서 『본사(本史)』[1785년]에서 『왕정농서』와 『태서수법』의 수차들을 자세하게 그대로 소개해 주었다.

수차를 비롯한 전문적인 수리 기술 지식이 형성되자 정조 때에는 1798년(정조 22) 「권농정구농서윤음(勸農政求農書綸音)」을 통해 전국의 관료들과 유생들에게 관개 수리 방안을 올리라 명하였다. 이때 박지원, 이희경(李喜儆), 박제가(朴齊家) 같은 중앙의 실학자들을 비롯해 이여박(李如樸), 이우형(李宇炯) 등의 호남 실학자들은 서양식 수차가 최고라며 제작해서 보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더 많은 수의 유생은 물을 거꾸로 끌어서 올리는 수차와 같은 기구는 자연의 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19세기 들어 호남 화순의 실학자 하백원(河百源)은 압축식 펌프인 옥형차의 원리를 응용해 수력을 이용해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수차인 ‘ 자승차(自升車)’를 발명하기도 하였다.

수차 보급이 성공하지 못한 역사적 배경

조선시대에는 효율적인 양수기인 수차가 보급되지 못하였다. 실학자들은 조선의 기술자들이 용렬하고, 농부들이 어리석어 수차 보급이 안 된다고 진단하였다. 그러나 전근대 조선 사회에서의 수차 사용은 자연 여건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한반도는 자연과 기후 조건이 벼농사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며, 실제로 19세기까지도 관개 수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논은 30%를 넘지 못하였다. 강우량이 논농사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장마철에 강우가 집중되어, 논농사에 부적합한 건조한 기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집중되는 강우 패턴으로 인해 한반도의 하천은 하상계수[최대유량/최소유량]가 1:300 이상으로 엄청나게 커서 인위적인 관개 수리가 거의 불가능한 구조이다. 자연조건이 수차를 이용하기 유리한 중국과 일본의 논농사 지역에 비해, 조선에서 수차를 이용하는 것은 전기 양수기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문중양, 『조선후기 수리학과 수리담론』(집문당, 2000)

논문

문중양, 「조선후기의 수차」 (『한국문화』 15,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4)
집필자
문중양(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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