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한성부좌윤,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숙빈(叔賓)
시호
효정(孝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05년(숙종 31)
사망 연도
1776년(영조 52)
본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주요 관직
호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좌윤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한성부좌윤,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숙빈(叔賓). 이시성(李始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여발(李汝發)이다. 아버지는 종성부사 이기성(李基聖)이며, 어머니는 김유(金洧)의 딸이다. 이기한(李基漢)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9년(영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7년 통덕랑(通德郞)으로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7년 정언(正言)으로 청요직(淸要職)에 발을 들여놓은 뒤 2년 후 지평(持平)·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759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직전 논란이 있어 황주목사로 파견되었다가 결국 1762년 다시 충청감사가 되었다.

이듬 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천거로 병조참판으로 탁용되었으며 도승지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일시 한성부좌윤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판서·호조판서를 지냈다.

1772년 문소전(文昭殿)의 옛터에 새로이 비각을 건립한 공으로 가자되었고, 그 해 10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무고를 받고 한 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774년 벼슬을 떠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 해 병으로 영중추부사의 한직을 맡았다가 영조가 은퇴하고 세손(世孫: 정조)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1776년 다시 우의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던 중 등청하다가 죽었다. 영조는 직접 제문을 지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문장에 매우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다 한다. 하지만 사신(史臣)은 이사관이 문식(文識)이 있고 평소 명망도 높았으나, 재상이 되어서는 일을 크게 처리하지 못한 ‘반식재상(伴食宰相)’으로 적고 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이계집(耳溪集)』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