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숙빈(叔賓). 이시성(李始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여발(李汝發)이다. 아버지는 종성부사 이기성(李基聖)이며, 어머니는 김유(金洧)의 딸이다. 이기한(李基漢)에게 입양되었다.
1729년(영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7년 통덕랑(通德郞)으로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7년 정언(正言)으로 청요직(淸要職)에 발을 들여놓은 뒤 2년 후 지평(持平)·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759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직전 논란이 있어 황주목사로 파견되었다가 결국 1762년 다시 충청감사가 되었다.
이듬 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천거로 병조참판으로 탁용되었으며 도승지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일시 한성부좌윤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판서·호조판서를 지냈다.
1772년 문소전(文昭殿)의 옛터에 새로이 비각을 건립한 공으로 가자되었고, 그 해 10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무고를 받고 한 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774년 벼슬을 떠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 해 병으로 영중추부사의 한직을 맡았다가 영조가 은퇴하고 세손(世孫: 정조)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1776년 다시 우의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던 중 등청하다가 죽었다. 영조는 직접 제문을 지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문장에 매우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다 한다. 하지만 사신(史臣)은 이사관이 문식(文識)이 있고 평소 명망도 높았으나, 재상이 되어서는 일을 크게 처리하지 못한 ‘반식재상(伴食宰相)’으로 적고 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