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두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지중추부사, 남포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나졸재(懶拙齋)
  • 자앙(子仰)
  • 시호청헌(淸憲)
인물/전통 인물
  • 본관전의(全義,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
  • 사망 연도1772년(영조 48)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지중추부사|남포군수
  • 출생 연도1680년(숙종 6)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해영 (경상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해동진신도상 중 이산두 초상 미디어 정보

해동진신도상 중 이산두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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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지중추부사, 남포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앙(子仰), 호는 나졸재(懶拙齋). 할아버지는 이명길(李鳴吉)이고, 아버지는 이필(李泌)이며, 어머니는 안칭(安偁)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2년(영조 8)에 유생으로 강경(講經)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받았다.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758년에 판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1767년에는 참판에서 지중추부사로 추천을 받아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찍이 시위(試闈)에 들어가 강(講)을 하였는데, 한 자를 잘못 읽었음을 깨닫고 강이 끝나면서 이 사실을 실토하자, 대관이 놀라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데 스스로 밝히려 하느냐고 하였다.

이산두는 남이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하여 나 자신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여 듣는 이들이 경탄하였다. 남포군수(藍浦郡守)로 천거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겨우 초옥 몇 칸만 남게 되었는데, 남들은 이산두가 새로 관직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영조는 이산두를 자주 볼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인에게 이산두의 도상(圖像)을 그려 오라 하고, 원손에게 ‘九十歲像’이라는 네 글자를 쓰게 하였다.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참고문헌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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