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앙(子仰), 호는 나졸재(懶拙齋). 할아버지는 이명길(李鳴吉)이고, 아버지는 이필(李泌)이며, 어머니는 안칭(安偁)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2년(영조 8)에 유생으로 강경(講經)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받았다.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758년에 판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1767년에는 참판에서 지중추부사로 추천을 받아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찍이 시위(試闈)에 들어가 강(講)을 하였는데, 한 자를 잘못 읽었음을 깨닫고 강이 끝나면서 이 사실을 실토하자, 대관이 놀라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데 스스로 밝히려 하느냐고 하였다.
이산두는 남이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하여 나 자신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여 듣는 이들이 경탄하였다. 남포군수(藍浦郡守)로 천거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겨우 초옥 몇 칸만 남게 되었는데, 남들은 이산두가 새로 관직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영조는 이산두를 자주 볼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인에게 이산두의 도상(圖像)을 그려 오라 하고, 원손에게 ‘九十歲像’이라는 네 글자를 쓰게 하였다. 시호는 청헌(淸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