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공보(公輔) 또는 국보(國輔), 호는 안재(安齋)·수옹(睡翁). 이진(李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재감부정 이흥손(李興孫)이다. 아버지는 이계통(李季通)이며, 어머니는 곽산군수 유맹근(柳孟近)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01년(연산군 7)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장악원직장에 임명되고 봉상시주부에 올랐다. 그 뒤 정언으로 발탁되어 이조좌랑·병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의정부 검상 및 사인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차례로 거쳤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해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내자시부정(內資寺副正)으로 승진하였다.
이듬 해 사간원사간이 되어 당시의 권신 유자광(柳子光)을 탄핵해 귀양보내고, 1510년(중종 5)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병조참지가 되었다. 뒤이어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을 지냈으며, 밀양부사로 부임해 토호들의 작폐를 엄금해 칭송을 받았다.
이어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병조참의·우부승지를 거쳐 1518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승진, 함안군(咸安君)에 봉해지고,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 때 충청·경상도 세곡(稅穀)의 집산지인 충주에 창고가 없어 노적된 곡식의 관리와 수송에 막대한 지장이 있자,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과 의논, 충주 가흥창(可興倉) 건물을 축조하였다.
그 해 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가흥창 설립 당시 손해를 입은 상인들의 모함으로 상호군으로 물러났다. 1519년 판결사로 서용되고, 뒤이어 경상좌병사·한성부우윤 겸 도총부부총관·호조참판을 거쳐 다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는데 과로로 순직하였다.
효성이 뛰어나고 청렴결백해 일찍이 중국 사신으로 다녀올 때 요동(遼東)에 이르러 일행이 사사로이 무역한 물건들을 적발, 소각하였다. 시호는 양간(襄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