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대사헌,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청지(淸之)
손암(損菴), 외암(畏菴)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10년(중종 5)
사망 연도
1587년(선조 20)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우승지|대사간|대사헌|부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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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대사헌,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청지(淸之), 호는 손암(損菴).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5대손으로, 장양도정(長陽都正) 이주(李儔)의 손자이며 남원부사 이승상(李承常)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6년(명종 1) 형 이증(李拯) 및 이양(李揚)과 더불어 진사시에 연벽(聯壁)하고, 선략장군(宣略將軍) 재임 때인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554년 예문관 검열이 되고 이어 승정원 주서, 홍문관 저작(著作), 경연청 설경(說經)을 역임하고, 1559년(명종 14) 참상(參上)으로 승계되어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1560년(명종 15) 홍문관 수찬, 병조좌랑, 이조좌랑을 거쳐 다음 해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다음해 사간원 사간과 홍문관응교(應敎)를 지낸 다음 가자(加資)되어 1565년(명종 20) 당상(堂上)인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다음해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1568년(선조 원년) 다시 우승지와 대사간이 되었다. 1570년(선조 3)에는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2년(선조 5) 황해도 감사를 거쳐 1574년에는 이조참의와 대사간이 되었고 1579년에는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이 때 동서분당이 일어나자 정희적(鄭熙績) 등과 함께 서인의 등용을 막으려는 주장을 폈다가 체직, 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대사헌이 되자 서인들이 10년전 황해 감사 당시의 근무가 근면치 못했다 거론하여 사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대사헌, 승지, 대사간, 부제학을 두루 역임한 다음 1586년(선조 19) 이조참판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국록(國祿)을 받았다. 저서로는 『외암집(畏菴集)』이 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경연일기(經筵日記)』
『은봉전서(隱峰全書)』
『옥계집(玉溪集)』
『백담집(百潭集)』
『광주읍지(廣州邑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황화집(皇華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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