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동주(東洲). 서울 출신. 1917년에 3·1독립선언 33인의 한 사람인 아버지 갑성(甲成)과 어머니 차수경(車淑卿)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에서 1975년까지 서울대학교 교수로 봉직하였고, 1960년에서 1961년까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 1956년에서 1967년까지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61년에는 중근동친선사절단장, 1962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 1975년부터 1976년 대통령정치담당 특별보좌관, 1976년∼1979년 국토통일원장관, 1980년∼1987년 대우재단이사장을 지냈으며 1981년에서 1982년에는 아주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89년 세종연구소장, 1989년∼1993년 세종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국제정치학)과 예술(한국고미술) 양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드문 인물로 꼽힌다. 국제정치학 쪽에서는 이 나라 국제정치학의 탄생을 알린 것으로 평가되는 저서 ≪일반 국제정치학≫(1962)에서 그는 “국제정치는 강대국의 시각이 아니라 내 땅, 내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그리고 ≪한국민족주의≫(1977년) · ≪한국과 세계정치≫(1987)에서는 주체적 학문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권역이론’과 ‘장(場)의 논리’로 불리는 탁월한 학문적업적을 남긴 정치학자로서의 영역을 넘어 사회과학자 내지 인문학자로서도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 까닭은 중국 · 몽고 등 아시아 전역에 걸친 종교 · 지리 · 문명사 전반에 대한 해박한 학문적 조예와 통찰 때문이다.
회화사쪽에서는 분석적인 현대적 미술사연구방법이 개발되기 전인 초창기에 그의 미술사는 감식의 미술사학이고 손꼽히는 ‘감식안’으로 평가받았다. 오세창(吳世昌)에게 그림보는 눈을 배웠고, 동주라는 아호도 그가 지어준 것이다. 미술관계 저서에는 동주라는 이름을 썼다.
≪한국회화소사≫(1972), ≪일본속의 한화≫(1974), ≪우리 나라의 옛그림≫(1975) 등의 저서를 통해 “미술을 알기 위해서는 이론보다는 철저하게 작품을 우선하라.”며 실물감상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어느 시대 그림이건 그 시대 감식안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그의 학문세계가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듯이 현실참여면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밖에도 ≪국제정치원론≫ · ≪정치와 정치사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