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 이운후(李云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산부사 이정(李禎)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계양(李繼陽)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김유용(金有庸)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숙부이다.
1492년(성종 23) 생원이 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01년 성균관전적에 올라 사간원정언·이조좌랑·사헌부헌납·병조정랑 겸 지제교·사헌부장령 겸 춘추관기주관·봉상시첨정·사간·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춘추관수찬관을 겸했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협력하였다. 그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겸하였다.
1508년(중종 3)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희망, 진주목사로 부임해 청렴과 검소를 위주로 백성을 다스려 왕으로부터 특별히 옷감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전임,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형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양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뒤 영해·김해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앞서 반정공신 책봉 당시에 이우의 녹훈 문제로 물의가 있었는데, 1514년에 입직 승지로서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아 삭훈되었다가 이듬해 안동부사로 서용되었다.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시에 뛰어나 산천의 명승을 읊은 것이 『관동록(關東錄)』·『귀전록(歸田錄)』에 전한다. 최숙생(崔淑生) 등과 친하였다.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재집(松齋集)』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