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록 ()

이원록 글씨
이원록 글씨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이조정랑, 병조정랑,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정서(廷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14년(중종 9)
사망 연도
1574년(선조 7)
본관
덕수(德水 : 지금의 황해북도 개풍)
주요 관직
이조정랑|병조정랑|공조참의
관련 사건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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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이조정랑, 병조정랑,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정서(廷瑞), 호는 송담(松潭). 이추(李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집의 이의무(李宜茂)이다.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행(李荇)이며, 어머니는 장산수(璋山守) 이조(李稠)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1년(중종 3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543년에 저작, 1544년에 부수찬·정언 등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1545년에 지평·교리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 이조정랑으로 재직 중 을사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당시 권신이던 숙부 이기(李芑)를 비판하고 이황(李滉)·정황(丁煌) 등 많은 선비들을 구하여주었다.

1549년(명종 4)에 병조정랑으로 재직시 안명세(安名世)에 대한 죄를 더할 것에 논의(論議)가 일어났는데 이기의 전횡을 비난한 일로 임백령(林百齡)의 탄핵을 받아 장류(杖流), 강계에 안치되었다가 이황 등 많은 사류의 상소로 풀려났다. 이 때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김난상(金鸞祥)·유담(柳湛) 등과 함께 복직되어 영흥부사에 이어 사인·판교·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간잡고(蓮幹雜稿)』
『용재집(容齋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대동야승(大東野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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