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치양(穉養), 초자는 비언(斐彦), 호는 후계(後溪)·만와(晩窩)·긍재(兢齋)·육우당(六友堂)·육우헌(六友軒)·기은(杞隱). 경상북도 봉화 출신. 이황(李滉)의 9세손으로, 이구몽(李龜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택동(金宅東)의 딸이다. 6남 2녀 가운데 차남으로 6형제 중 유일하게 현감벼슬을 했으며, 형제 중 문장이 가장 뛰어났다.
8세 때 팔촌 형 이세윤(李世胤)으로부터 『소학』을 배웠고, 18세에 이한우(李漢佑)의 딸과 혼인하였다. 1779년(정조 3) 생원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태학에 들어갔다. 1786년 만촌(晩村)으로 이사해 그 집을 만와(晩窩)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1790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옛집으로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799년 효릉재관(참봉)에 제수되었고, 1802년(순조 2)에는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에 올라 대조전을 수리하였다. 일이 끝나자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이 되고 그 해 가을에는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805년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어 재정을 윤택하게 관리했고, 이듬해인 1806년에는 은진현감이 되어 단옥(斷獄)을 공평히 하고 상벌을 엄격히 하였다. 그러나 죽림서원(竹林書院)의 유생 가운데 군역을 기피하던 많은 양민 장정을 정리하려다가 감영의 힘을 빌어 이를 저지하던 유생들과 충돌을 빚고 이 일로 감영의 뜻을 거슬렸기 때문에 그 해 겨울 부임 9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 뒤 1811년 가을, 후계서당(後溪書堂)을 짓고 독서와 예서에 잠심(潛心)하였다. 음양서와 농공 기술에 두루 통달했으며 절약하는 생활을 하였다. 가문의 대소사를 주장하고 후세손에게 규범으로 하고자 「무첨가(無胤歌)」를 지었다. 이황의 문집을 교검(校檢), 개간(改刊)하고 몽재(蒙齋)·청벽(淸壁)·만호(晩湖) 등의 유문을 수습해 『계산세고(溪山世稿)』 3책을 만들었다. 문집으로 『후계집(後溪集)』이 현전하며, 작품으로는 「화왕전(花王傳)」과 「일락정기(一樂亭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