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중기에, 우승지, 장례원판결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헌납(獻納) 이거(李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이달존(李達尊)이고, 아버지는 사직서영(社稷署令) 이탕(李宕)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응진(金應辰)의 딸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정암(李廷암)의 아우이다. 정윤희(丁允禧)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8년 하지사서장관(賀至使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함경도순무어사·광주목사(廣州牧使)·홍문관부수찬·의정부검상·승정원좌부승지·대사성을 거쳐 1589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다.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병을 모아 성거산(聖居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했으며, 장단·삭녕 등지에서도 의병을 모집해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3년 장례원판결사가 되고 다음해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와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승문원부제조·비변사당상을 역임하고, 1595년 대사헌에 이어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었다. 160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북인이 정권을 잡고 정계가 어지럽자 양주 송산 두천리(松山杜川里)로 물러나 대사성·호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어도 나가지 않았다. 1606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다음 해 임지에서 죽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성력(星曆)·복서(卜筮)·술수(術數)에도 통달했다 한다. 이원익(李元翼)·이호민(李好民)·이수광(李睟光) 등과 가깝게 지냈다. 1617년(광해군 9)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동각잡기』·『황토기사』·『용사기사(龍蛇記事)』·『수춘잡기(壽春雜記)』·『지퇴당집』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지퇴당집(知退堂集)』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