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혼(景混), 호는 옥호(玉壺). 이하조(李賀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숭신(李崇臣)이고, 아버지는 판서 이민보(李敏輔)이며, 어머니는 서명성(徐命聖)의 딸이다.
1792년(정조 16)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이듬해 호서암행어사로 나갔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어 김종수(金鍾秀)·정만석(鄭晩錫) 등의 치죄를 요청하는 등 활발한 언론 활동을 폈으며, 용인진위어사(龍仁振威御史)로 다녀와 대사간을 거쳐 곧 승지로 체직되었다.
순조 즉위 후 이조참의·대사간·이조참판·승지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이조참판이 되고 자품이 한 단계 높아졌다. 1812년(순조 12) 형조판서를 제수받았다가 한성 서부의 사대부집 노비가 자식을 죽이고 도망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파직되었다. 얼마 후 좌참찬으로 서용되고 예조판서를 거쳐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그 뒤 홍문관제학·우참찬·대사헌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다시 이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1816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돌아와 홍문관제학·좌빈객(左賓客)·우참찬을 거쳐 평안감사로 외보(外補)되었다가 형조판서를 배수받았다.
1820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하정사(賀正使)로 청에 파견되었다. 이 후 우빈객·예문관제학·병조판서·좌빈객·호조판서·이조판서·공조판서 등 현직을 두루 지냈다.
1827년 승지 이해청(李海靑)과 양사(兩司: 사간원·사헌부)가 1814년 순조의 병환이 위독했을 때 김기서(金基敍)·김기후(金基厚)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탄핵하자, 봉조하(奉朝賀)로서 무고라고 소를 올렸지만 결국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참시당하였다. 풍양 조씨계의 당여(黨與)로 안동 김씨계와 맞서다가 끝내 희생당한 것이다. 1835년(헌종 1) 대왕대비의 명으로 신원(伸寃: 억울하게 지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