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병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순조 즉위 후 이조참의·대사간·이조참판·승지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이조참판이 되고 자품이 한 단계 높아졌다. 1812년(순조 12) 형조판서를 제수받았다가 한성 서부의 사대부집 노비가 자식을 죽이고 도망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파직되었다. 얼마 후 좌참찬으로 서용되고 예조판서를 거쳐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그 뒤 홍문관제학·우참찬·대사헌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다시 이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1816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돌아와 홍문관제학·좌빈객(左賓客)·우참찬을 거쳐 평안감사로 외보(外補)되었다가 형조판서를 배수받았다.
1820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하정사(賀正使)로 청에 파견되었다. 이 후 우빈객·예문관제학·병조판서·좌빈객·호조판서·이조판서·공조판서 등 현직을 두루 지냈다.
1827년 승지 이해청(李海靑)과 양사(兩司: 사간원·사헌부)가 1814년 순조의 병환이 위독했을 때 김기서(金基敍)·김기후(金基厚)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탄핵하자, 봉조하(奉朝賀)로서 무고라고 소를 올렸지만 결국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참시당하였다. 풍양 조씨계의 당여(黨與)로 안동 김씨계와 맞서다가 끝내 희생당한 것이다. 1835년(헌종 1) 대왕대비의 명으로 신원(伸寃: 억울하게 지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전고대방(典故大方)』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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