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중(敬中). 이대승(李大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탁(李倬)이고, 아버지는 이요신(李堯臣)이며, 어머니는 광해군 당시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다가 해로(海路)에서 죽은 정응두(丁應斗)의 딸이다.
일찍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참봉으로 근무하던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고, 1605년 순변사 이시언(李時言)에게 주는 교서를 어지럽게 휘갈겨 썼다는 이유로 탄핵받았으나, 곧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병조좌랑·예조정랑을 거쳐, 이듬해에는 지평·전적·지평을 차례로 제수받아 유희분(柳希奮) 등과 함께 능해군(綾海君)구성(具宬)의 탄핵에 앞장섰고, 1608년 예조정랑에 올랐다.
배천군수(白川郡守)로 있던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나자 김직재 첩의 사위인 황보신(皇甫信)을 체포한 공으로 가자되어 형조참의에 발탁되었고, 그 뒤 훈신으로서 상을 당하여 호상(護喪)의 예를 받았다. 1615년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왔고, 이듬해 도총관에 제수되었다.
1617년 인목대비의 폐비 문제가 일어나자 이에 동조하였고, 1620년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부임한 뒤 술에 빠져 오랫동안 좌아(坐衙)를 폐기하였다는 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석흥군(碩興君)으로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