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재원(載元), 호는 허주(虛舟). 이정수(李廷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빈(李贇)이고, 아버지는 도사 이시정(李時程)이며, 어머니는 이형장(李亨長)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한림·삼사이랑(三司吏郎)을 역임하였고, 벼슬은 감사에서 그쳤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서 일찍 학문을 닦았고 예의범절에 밝았다.
정언으로 재직중 1641년 광해군의 초상 때 대사간 이덕수(李德洙)와 함께 예조에 올린 계사(啓辭)에 백관이 변복하고 모여서 곡한다는 등의 말로 물의를 빚자 그는 “광해가 버림받은 것은 인륜의 바깥에 있는 것이지 연산의 황란(荒亂)과는 다르므로 쫓아내고 폐하였을 때는 비록 죄인이나 관을 덮은 뒤에는 은혜를 가하여 왕자의 열(列)에 서게 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조께서 은혜와 예의를 특별히 더하여 비록 대우를 지나치게 하였다하여도 이것은 성상의 큰 덕에서 나온 일이므로 신하가 감히 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뒤집고 망령되고 혼미하게 하여 시비에 현혹되었음을 스스로 반성하여 삭탈관직을 자청하였고, 또 대사간 이명한(李明漢)의 상소도 있고 하여 관직을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