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악(安岳), 이계을(李桂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신(李晨)이고, 아버지는 이구관(李九寬)이며, 부사 이희순(李希舜)의 아버지이다.
일찍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1463년(세조 9) 팔괘도(八卦圖)에 능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선전관(宣傳官), 사온서주부(司醞署注簿)를 거쳐, 1466년(세조 12) 군적사종사관(軍籍使從事官)으로 파견되었다가 일본국 사자(使者)의 접대 잘못으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으나, 이듬해 북방의 건주위를 정벌한 공으로 가자되었다.
1468년(세조 14)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으로 재직 중 별시 문과에서 병과 급제하였고,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구자(口子)의 3총통(三銃筒)을 설치하는 데 공을 세웠다.
예종이 즉위한 뒤 사헌 지평에 제수되었고, 1477년(성종 8)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었다. 1481년(성종 12) 장령으로 재직시 주문사(奏聞使)로 북경(北京)에 갔다 물의를 일으킨 한명회(韓明澮)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1483년(성종 14)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있으면서 삼전(三殿: 貞憲大妃, 성종의 母 昭惠王后, 성종의 계비 貞顯王后를 일컬음.)의 온양(溫陽) 거둥과 대행대비(大行大妃: 대비가 죽은 뒤 시초를 받기 전의 칭호)의 상사(喪事)에 대한 공으로 당상에 올랐다.
그 이후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대사간 등을 역임한 뒤, 1490년(성종 21)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대사간 재직시 뇌물을 받았다는 거짓 모함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 병조참지, 참의, 남원부사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