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지(文之). 이유(李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제상(李齊尙)이고, 아버지는 이세적(李世迪)이며, 어머니는 조석오(趙錫五)의 딸이다.
1756년(영조 32) 정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1773년(영조 49) 정언(正言)으로 재직 중 어영대장(御營大將) 장지항(張志恒)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775년 대각(臺閣)의 나쁜 풍속을 씻어 버리게 하였다는 공으로 숙마(熟馬)가 하사되었으며, 영조가 죽자 헌납으로서 의약청의 의관을 탄핵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 홍인한(洪麟漢)의 대리청정을 방해한 죄에 대해 삼사(三司) 관원들이 논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사간 이석재(李碩載) 등과 함께 사판(仕版: 관직자들의 명단)에서 삭제당한 채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이내 복직되었으나, 이홍제(李弘濟) 나국(拿鞫: 죄인을 잡아다가 심문함.) 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그 뒤 1779년(정조 3) 헌납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올랐으나 청탁과 뇌물을 받았다는 정언(正言) 이제만(李濟萬)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지내다가, 1785년 봉조하(奉朝賀) 홍봉한(洪鳳漢)의 묘터 서쪽땅[白虎]을 침범하여 장사를 지냈다는 이유로 경기(京幾)에 귀양갔다.
1793년 대사면령으로 풀려난 뒤, 1798년(정조 22) 조정에 나와 벼슬하는 관원으로 70이 되도록 해로(偕老)하는 사람들에게 한 자급씩 올려주는 사은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