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星州).자는 중운(仲雲), 호는 경산(京山). 벼슬은 감역(監役)을 지냈다. 전학(篆學)에 뛰어났으며 음악에도 통하여 그의 퉁소는 홍대용(洪大容)의 거문고와 함께 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재주로 당시의 명사였던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성대중(成大中)·홍원섭(洪元燮) 등과 교유하였다. 글씨는 당나라 이양빙(李陽氷)의 소전(小篆)을 따랐는데, 『서청(書鯖)』에서는 그의 전서가 이름은 났으나 근골(筋骨)이 적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