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서울 내수동에서 아버지 김영제(金永濟)와 어머니 유운자(柳雲子) 사이의 1남 4녀 중 셋째 딸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우경(又璟), 민자는 예명이다. 14살 때 경기고녀(현 경기여고) 재학 중 하교 길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스스로 찾아가 입문하였다. 최승희의 제자가 되어 부모 몰래 춤을 배웠다.
1933년 3월 6일 최승희가 다시 일본으로 떠날 때, 그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동경으로 갔다. 최승희의 딸 안승자(安勝子: 안성희의 아명)를 돌보는 조건으로 유학자금을 보조해 주기로 했는데, 실제로는 식모살이와 같았다고 한다.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연구소에 들어갔으나, 개인적으로 발레를 배우고자 에리아나 바바로바(일본으로 망명한 러시아 발레리나)를 찾아가서 발레수업을 받았다. 1935년 최승희의 부민관 공연 때 김민자는 최승희와 듀엣을 하거나 솔로로 출연했다. 이때 김민자는 최승희가 지어준 와까구사 도시꼬[若草敏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최승희가 해외 공연을 떠나면 김민자는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맡아 조교로서의 역할을 했다.
1938년 12월 20일 경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의 요청으로 히비야 공회당에서 파트너로 공연하였다. 이때 처음 긴 도시꼬[金敏子]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춘향이와 이도령」, 「봄처녀」 등을 공연하였다. 또 둘은 중국의 청진, 상해 등에 순회공연을 하였다. 이후 최승희와도 파트너로 공연하였다.
김민자는 26세에 동갑나기 동북제대(東北帝大) 대학생 김태철(金泰喆)에게 구혼을 받았고, 27세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결혼하였다. 남편은 검찰청 검사가 되었다. 6·25전쟁 때 남편은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는데,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자손이 없다.
1940년 9월 첫 개인 공연인 ‘김민자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민자는 최승희가 도쿄에 레코드를 취입하러 온 한성준을 찾아가서 조선전통춤을 배울 때도 동행했다. 최승희가 한 달여 동안 춤을 배울 때 김민자는 그녀의 수발을 들며 어깨너머로 한성준의 춤을 익혔고, 최승희의 복습과 기억을 돕기도 했다. 이때 한영숙과도 인연을 맺었다.
1961년 창단된 예그린악단의 안무를 담당하여, 1회에서 14회까지 안무지도를 했는데 미국 공연 후 악단이 해체되었다. 1966년 한국무용협회로부터 무용공로상을 받을 때, 제자 주리(朱莉)에게 자신의 대표작 「봄처녀」를 주어 춤추게 했다. 시상 후 1년 동안 앓아눕게 되었는데, 이로써 은퇴하여 서울 종암동 소재 영산법화사에 40여 년을 머물다가 2012년 11월 5일에 별세하였다.
1966년 한국무용협회 무용공로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