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장선애이고, 예명이 장추화이다. 1936년 일본 도쿄에 있는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찾아가서 춤에 입문하였다. 해주 여고를 졸업하고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서 최승희 문하가 되었다. 장추화는 최승희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최승희가 3년간 해외공연을 나갔을 때는 일본에서 연구소를 지키며 가족들을 돌보았고, 일본에서 중국으로 옮겨 갈 때도 역시 동행했다. 1944년 북경 부근에 개설한 ‘동방무용연구소’에서 장추화는 최승희를 대리하여 제자들을 지도했다. 1945년 임신중인 최승희를 대신하여 공연단을 이끌고 서울에 와서 공연을 준비하던 중에 해방을 맞았다. 최승희도 곧 서울로 들어 왔으나 다시 북한으로 넘어가고, 장추화는 서울에 남아서 6··5전쟁이 발발하기까지 각종 회합과 공연에 적극 동참하거나 주도했다. ‘장추화무용연구소’를 통해 송범·김진걸·정무연·황무봉·최희선·조광·배정혜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장추화는 1950년 전쟁이 나자 예술인 선전선동대로 편성되어 한동인·함귀봉·최가야·박이랑·박용호 등과 함께 9월 24일 경 북쪽으로 소환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초기에는 ‘국립최승희무용극장’에서 안무자로 활동했다. 1958년 최승희 숙청 사건 이후 함경북도 가무단 안무자로 발령이 났고, 1978년까지 약 20년간 지방 가무단에서 안무자로 활동했다. 장추화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최승희 추도모임에 참석했던 2003년의 기록까지만 확인되고 있다.
1945년 조선무용건설본부, 1946년 조선무용예술협회, 1946년 대한예술무용협회, 조선교육무용연구소, 1947년 청년무용집단, 1949년 현대무용가집단 등에서 임원을 맡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47년 11월 2일 장추화무용발표회에서 「신흥무용기본」, 「천하대장군」, 「옥중 춘향」을 공연했다. 1948년 10월 6~18일 「칠석날」, 「댄스의 기본」로 장추화신작무용발표회를 공연했다. 그는 인도·태국 등 남방계 스타일의 현대무용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