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이시우(李時雨). 전라남도 나주 출신. 1918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사회운동을 벌이다가 1919년 4월 징역 2년형을 받았고, 그해 10월 전라북도에서 이채우(李採雨) · 김영순(金永淳) 등과 함께 독립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던 중 일본경찰에 잡혀 조사를 받았고, 그뒤 계속 사회운동을 전개하여 1921년 2월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922년 7∼11월에 조선일보사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면서 4회에 걸쳐 노동대회 강연회를 개최하여 조선인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제에 대하여 격렬한 항일강연을 하였다. 1923년 1월 조선노동대회에 가입하여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유노동자조합을 조직하고 상임위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았다.
1924년 10월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연락부를 담당하였고, 1926년 1월 경성노동회의 상무위원으로 무안군의 소작권쟁의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급파되었으며, 그해 2월 이래 전라남도 나주자유노동조합 및 나주농민조합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0월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 위원, 1930년 11월 신간회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3월 나주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조합원 약 200명을 규합하여 사회주의운동을 목적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해 7월 조선청년동맹과 중앙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활약하던 중 잡혀 1933년 4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934년 10월 출옥한 뒤 사상을 전향하였고, 1936년 2월 사상전향자 친일단체인 백악회(白岳會)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백악회를 확대 개편하여 조직된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검사장으로 참여하는 등 친일행적을 남겼다.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사실이 드러나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