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할아버지는 선조의 제13왕자 인흥군 이영(仁興君 李瑛)이며, 아버지는 낭원군 이간(朗原君 李偘)이다.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1695년(숙종 21) 사은사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1698년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가 심양(瀋陽)에 오자 다시 문안사로 파견되었다.
항상 술을 즐겨, 1702년에는 국상회곡(國喪會哭)의 날인데도 술에 취하여 망언을 하는 등 그릇된 행실을 보였다 하여 사간원으로부터 사판(仕版: 관직자들의 명단)에서 삭거하라는 탄핵을 받았으며, 그뒤 종묘대제(宗廟大祭)의 헌관(獻官)으로 차정(差定)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칭병하고 대제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지속적인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1707년 종반(宗班)으로서 재상들과 깊이 사귀면서 사당(私黨)을 이루었다는 삼사의 탄핵을 받고 정배당하였으며, 이듬해 숙종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죄를 풀어줄 것을 명함으로써 풀려났다.
1722년(경종 2) 사은진주 겸 동지사(謝恩陳奏兼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가는 도중 봉황성(鳳凰城)에서 강희제의 죽음을 알고 조정에 이를 알려 대책을 갖추게 하였다.
1725년(영조 1)『열성어필(列聖御筆)』을 간행하는 데 성구관(成勾管) 당상으로 기여한 바가 컸다 하여 상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사신(史臣)에 의하여 종신(宗臣) 가운데에서는 매우 현명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