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로(元老). 첨지중추부사 이성달(李成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명효(李明孝)이고, 아버지는 이양진(李陽晋)이며, 어머니는 유익(柳益)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매우 가난하게 지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밤낮으로 학업에 힘썼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지평·홍문관수찬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의 문학·필선을 역임하였다.
그 뒤 함평현감으로 재직할 때 쌀 300곡(斛)을 비변사에 바치니, 조정에서는 그를 군수로 승진시키려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현민에게 선정을 베풀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현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로 호종(扈從)하였고, 후금과의 화약이 성립된 뒤 원창군(原昌君)을 왕자로 가장하여 신사(信使)로서 심양(瀋陽)에 보낼 때 부사로 따라갔다.
그 때 후금측에서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로 임무를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질로 잡혀갔던 남녀 수백명을 쇄환(刷還)하였다. 그 뒤 동래부사·부승지를 역임하였다.
한편 쇄환된 사람 가운데 해주의 김굉인(金宏寅) 형제가 있었는데,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그가 죽은 뒤에 제사를 지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