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함평현감, 동래부사, 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원로(元老)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2년(선조 5)
사망 연도
1637년(인조 15)
본관
용인(龍仁)
주요 관직
정언|지평|홍문관수찬
관련 사건
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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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함평현감, 동래부사, 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로(元老). 첨지중추부사 이성달(李成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명효(李明孝)이고, 아버지는 이양진(李陽晋)이며, 어머니는 유익(柳益)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매우 가난하게 지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밤낮으로 학업에 힘썼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지평·홍문관수찬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의 문학·필선을 역임하였다.

그 뒤 함평현감으로 재직할 때 쌀 300곡(斛)을 비변사에 바치니, 조정에서는 그를 군수로 승진시키려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현민에게 선정을 베풀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현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로 호종(扈從)하였고, 후금과의 화약이 성립된 뒤 원창군(原昌君)을 왕자로 가장하여 신사(信使)로서 심양(瀋陽)에 보낼 때 부사로 따라갔다.

그 때 후금측에서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로 임무를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질로 잡혀갔던 남녀 수백명을 쇄환(刷還)하였다. 그 뒤 동래부사·부승지를 역임하였다.

한편 쇄환된 사람 가운데 해주의 김굉인(金宏寅) 형제가 있었는데,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그가 죽은 뒤에 제사를 지냈다 한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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