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보 ()

목차
서예
개념
역대 고인(古印)이나 명가들이 새긴 인장을 모아 만든 서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역대 고인(古印)이나 명가들이 새긴 인장을 모아 만든 서적.
내용

중국에서는 송나라 휘종의 ≪선화인보 宣和印譜≫를 비롯하여 조극일(晁克一)의 ≪집고인격 集古印格≫, 강기(姜夔)의 ≪집고인보 集古印譜≫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다.

원대(元代)·명대(明代)에는 예찬(倪瓚)·심주(沈周)·고종덕(顧從德) 등 제가(諸家)가 인장을 많이 수장하였고, 모두 저록(著錄 : 기록)이 있었으나 지금 전하는 것은 ≪고씨집고인보 顧氏集古印譜≫가 있을 뿐이다. 청대(淸代)에 이르러서는 왕계숙(汪啓淑)의 ≪비홍당인보 飛鴻堂印譜≫와 진개기(陳介祺)의 ≪십종산방인거 十鐘山房印擧≫가 고인을 가장 많이 모아 크게 이루었다.

그 뒤 이름난 전각가(篆刻家)가 배출되어 여러 전각가의 작품을 모으거나 혹은 한 사람의 각인(刻印)을 모아 세상에 내어놓는 것으로 인보·인존(印存)·인집(印集)으로 일컫는 것이 있으니 모두 인장의 인영(印影 : 인을 찍은 글자의 형적)을 모은 책이다.

우리 나라에는 왕실에서 편찬한 ≪보소당인존 寶蘇堂印存≫을 비롯하여 ≪완당인보 阮堂印譜≫·≪전황당인보 田黃堂印譜≫·≪근역인수 槿域印藪≫가 있다. ≪보소당인존≫은 조선 제24대 헌종의 어인(御印)을 비롯하여 역대 군왕(君王)의 용인(用印) 및 국내외의 명각(名刻)이나 명사들의 인장을 모은 인보로서 그 이름을 헌종의 아호를 따서 ≪보소당인존≫이라 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인보이다.

≪완당인보≫는 김정희(金正喜)의 용인을 모은 것이며, ≪전황당인보≫는 20세기초 이용문(李容汶)이 민영익(閔泳翊)의 용인과 오창석(吳昌碩)의 각인을 주로 하고, 그 밖의 여러 인각을 모아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근역인수≫는 오세창(吳世昌)의 편집으로 역대 명가들의 용인을 모은 인보의 집대성으로서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근묵 槿墨≫·≪근역서휘 槿域書彙≫와 더불어 한국서화계의 금자탑을 이루어놓은 것이다.

인보는 인장의 예술성에 대하여 눈이 뜨이게 된 12세기 초 송대에 비로소 생기게 되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14세기말에 나타나 19세기초 헌종 대에 이르러서 볼 수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인장은 있었으며 특히 고려시대의 동인(銅印)은 유명하며 그 유물들이 많이 눈에 뜨이나 인문(印文)이 문자가 아닌 것이 많아 판독하기 어렵다.

반면, 조선 초기의 인장은 원·명의 각인을 닮아 철선전(鐵線篆)의 주문(朱文)과 옥저전(玉箸篆)의 백문(白文)으로 모두 소전(小篆)을 숭상하였다. 이러한 유행은 모두 중국의 인보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전각예술(篆刻藝術)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미 6-서예-』(임창순 감수, 중앙일보사, 1981)
『中文大辭典』(中華學術院, 1975)
『篆刻藝術』(王比兵, 台北 漢光文化公司, 1985)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