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총 높이 291㎝, 비신 높이 168㎝, 너비 72㎝, 두께 26㎝. 1695년(숙종 21)에 숙종은 인조반정의 사적이 흐트러짐을 염려한 나머지 친히 비문을 짓고, 오위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글씨를 써서 인조의 별장 자리에 비를 세웠다. 인조별서는 당시 고양에서 관장했던 연서역(延曙驛: 지금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역 부근) 뒤편에 있었는데 도성에서 10리 거리였다.
이곳은 원래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 원종으로 추존)이 소유했던 터전으로, 인조[당시 능양군(綾陽君)]는 이곳에서 세상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광해군이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던 때이다. 이에 인조는 정치를 바로잡고자 서인 일파인 김류(金瑬),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과 이곳에서 반정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반정 거사일에 장단부사 이서(李曙)와 이천의 이중로(李重老) 군사가 이곳에서 합류하고,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사와 합세하여 창의문(彰義門)을 통해 창덕궁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축출함으로써 반정을 성공시켰다. 이러한 반정의 성공 사실을 기념하며 반정의 과정과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익공계(初翼工系) 공포(栱包: 처마를 받게 한 짜임새)를 갖춘 팔작집(합각집) 비각(碑閣) 안에 보존되어 있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비신 앞면에는 숙종의 어필(御筆)로 ‘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인조대왕용잠지시별서유기비)’라는 표제가 쓰여 있다. 그리고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는 8각과 12각의 2중 기단 위에 놓여 있으며 거북머리는 험상궂게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낸 모습이다. 비신 위에는 이수 대신 지붕 모양의 가첨석을 얹어 조선시대 석비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