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사경(士經), 호는 정곡(靜谷). 보은현감 임효돈(任孝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안군수(邃安君守) 임한(任漢)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임유겸(任由謙)이며, 어머니는 청단찰방(靑丹察訪) 이신(李愼)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고, 1513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제수된 뒤 검열·정자·저작·부수찬·수찬·정언·이조·정랑·병조정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9년 지평으로 사림의 공론을 좇아 정국공신(靖國功臣)의 개정을 주청했고, 기묘사화로 헌납에서 승문원박사로 좌천되었다.
1524년 이후 지평·세자시강원필선·검상·사인·세자시강원보덕·집의·전한 등을 거쳐, 1527년 직제학에 올랐다. 1530년 사인을 거쳐 종부시정 역임 시 종친들의 잘못을 철저히 규찰하였다.
이 해 집의로 전보되고, 이조판서 장순손(張順孫)의 미움을 사서 사섬시정(司贍寺正)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종부시정·사섬시정·보덕을 거쳐 다시 집의가 되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폐정을 논박하다가 대사간 심언광(沈彦光)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예산으로 퇴거하였다.
1537년 김안로·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제거되자 봉상시부정을 거쳐 예조참의로 중용되었다. 1539년 동지사로 주청사인 권벌(權橃)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종계(宗系)의 정정을 주청하였다. 이후 전라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1544년 예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고, 빈전제조(殯殿提調)를 맡아 중종의 국장의례를 관장하였다.
1546년(명종 1)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녹선되고, 지춘추관사를 겸임해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좌참찬·우참찬에 오르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및 오위도총관을 겸하였다. 1551년 양종(兩宗) 및 선과(禪科)가 다시 설치되자 이단의 혁파를 적극 주장하였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문집으로 『정용재집(靜容齋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