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완도 출신. 수원고등농림학교를 2년간 수료한 뒤 1926년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4개월 만에 퇴학당하였다.
1927년 3월부터 전라청년연맹 상임위원, 전남청년연맹 위원장 등을 지냈고, 강해석(姜海錫)·박인수(朴仁洙) 등과 항일학생운동을 목적으로 한 광주학생 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신간회 광주지회에 가입, 상무간사를 지내면서 항일학생운동을 지도하였고, 1929년 4월에는 조길룡(趙吉龍)·김상돌(金相突)·송동식(宋東植)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같은해 11월 박오봉(朴五鳳)·강석원(姜錫元)·국채진(鞠採鎭)·최인식(崔仁植) 등과 제2차광주학생항일시위를 주도하여 전단살포와 시위를 감행하다가 일본경찰에 쫓겨 피신하였다.
조선학생전위동맹의 간부인 차재정(車載貞)·곽양훈(郭良勳) 등과 같이 광주학생 항일시위의 내용과 항일궐기를 촉진하는 격문을 작성, 경성제국대학 및 각급학교·사회단체에 살포하는 동시에 평양·대구 등지에도 발송하며 활동하던 중 그 해 12월 서울에서 붙잡혔다.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32년 12월 경성방직공장 직공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시켰던바, 다시 소요 조종자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