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누문(重層樓門). 수원성(水原城)의 북문(北門)이다. 하나의 홍예문(虹蜺門)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에 둥근 옹성(甕城)을 갖추었다.
홍예는 안쪽이 바깥쪽보다 높이나 너비가 조금 크게 만들어졌는데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다. 안쪽 홍예 좌우로는 무사(武砂)라고 부르는 네모반듯하게 다듬은 돌로 사다리꼴의 돌출면을 만들고, 양쪽으로 계단을 설치하여 누각으로 오르도록 하였다. 바깥 홍예에는 두 짝의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안팎 홍예 사이의 천장에는 구름모양을 그린 개판(蓋板)을 대었다. 홍예 위로 4개의 누조(漏槽)를 설치하고, 성벽 위에는 안팎에 총구(銃口)를 갖춘 여장(女墻)을 쌓았다.
누각은 다포식(多包式)의 화려한 공포를 짜고 우진각의 기와지붕을 덮었다. 공포는 하층 외2내3출목, 상층 내외3출목으로 양끝에 섬세한 장식이 가미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였다. 벽면에는 모두 판문을 달았는데, 앞쪽과 양 측면에는 짐승 얼굴을 그리고 뒤쪽에는 태극을 그려넣었다.
옹성은 문 바깥쪽에 전(塼)으로 반원형을 그리면서 쌓았으며 한 가운데 홍예문을 내었다. 홍예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다섯 개의 구멍을 갖춘 큰 물통으로, 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문의 좌우로는 성벽이 이어지며 문에서 53보(步) 되는 곳에 각각 적대(敵臺)가 마련되었다. 적대는 성벽 바깥쪽으로 돌출한 높은 대로, 적을 좌우에서 살필 수 있고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 문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성문 형태를 취하고 있고 규모나 구조가 서울의 남대문과 매우 비슷하지만, 옹성 · 적대와 같은 남대문에는 없는 새로운 방어용 시설을 갖춘 점이 독특하다. 이것은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주장한 바를 실천에 옮긴 결과이며, 특히 실학파 학자들의 적극적인 제안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수원시의 시가지계획사업으로 문 좌우의 성벽이 헐렸으며, 1950년 6 · 25전쟁 때 폭격으로 누각이 소실되었다가 1978년 문루는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조선 전기에 세워진 서울 남대문에 필적할 만한 당당한 외관을 갖추었고, 남대문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방어시설을 갖춘 진일보한 성문건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