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강(子剛), 호는 유정(柳亭). 장균(張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맹희(張孟禧)이고, 아버지는 집의 장충보(張忠輔)이며, 어머니는 김약평(金若枰)의 딸이다.
1515년(중종 10) 알성문과에 장원하고, 이듬해 정언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부수찬·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 등을 거쳐 1519년 응교 역임 시 1521년의 기묘사화의 여파인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526년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문과 중시에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1529년 병조정랑, 그 이듬해 군자감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532년 김안로(金安老)의 일당에게 몰려 유배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후 해배되었다. 1547년(명종 2) 봉상시정을 거쳐 1550년 예빈시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판교에 올랐다.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정통하여 시강관 시절에는 진강(進講)에 선발되었다. 기묘명현의 천거로 한 때 명망이 있었으나, 심정(沈貞)의 소요정(逍遙亭) 정자 서문을 지으며 미사여구를 남발하여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유정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