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여행자나 상인들에게 숙박시설을 제공하였던 주막촌(酒幕村)에서 더 발달한 가촌(街村)이었다. 장호원은 고구려의 노음죽현(奴音竹縣)에 속하였으나 신라시대에 음죽(陰竹)으로 명칭이 바뀌어 개산군(介山郡)에 속하였다.
1018년(현종 9)에는 충주에 예속되었다가 1414년(태종 14)에 현감을 두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1895년(고종 32)이천군에 속하였다가 곧 독립된 음죽현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이천군에 속하여 청미면(淸渼面)이 되었으며 그 뒤 1941년장호원읍으로 승격되어 이름이 바뀌었다.
장호원을 통과하는 영남로는 삼국시대부터 이용되던 교통로로서 중남부 내륙지방 보부상의 통행로였던 서울·장호원·상주·부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신작로 건설의 근간을 이루었다.
신작로의 개통 이후 역취락들은 몰락한 반면 도로변에 발달한 장호원은 지방행정·상업·교통의 요지로 성장하였다. 현재도 장호원은 서울에서 충주로 남북을 연결하는 3번국도와 평택·제천·영월을 동서로 연결하는 38번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