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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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영
장희영
체육
인물
해방 이후 대한체육회 감사를 역임한 체육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36년
사망 연도
1981년
출생지
서울
목차
정의
해방 이후 대한체육회 감사를 역임한 체육인.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출신. 학창시절부터 운동을 즐겨 했으며, 1962년 한국체육관 역도부 사범으로 체육계에 입문하였다. 1965년 개인 도장 마포역도관을 열어 관장 겸 사범으로 많은 역사(力士)와 보디빌더(body builder)를 길러냈다.

1967년에 대한역도연맹에 감사(監事)로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역도계의 주도권 쟁취 당파싸움으로 복마전 같던 풍토를 바로잡은 행동파 체육행정인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며, 나아가 국제외교통으로 한국 역도의 대외적 견문을 높이고자 노력하였다. 1970년 총무이사, 1972년 연맹의 중추역인 전무이사로 피선되어 살림을 도맡았다.

건장한 체구와 당당한 풍모로 지칠 줄 모르는 의욕을 지녔으며, 탁월한 외교 수완으로 국제역도계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특히 동구권 스포츠 외교활동에서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9년부터 1980년까지 파견된 국제대회 및 회의 출장은 모두 41회로, 1977년에는 가장 많은 7회를 기록하였다.

그의 의리와 열성은 국제역도계에서도 인정받아 국제역도연맹(IWF)의 고드프리드 쇠들(오스트리아) 회장, 토마스 아얀(헝가리) 사무총장과 소련·폴란드·불가리아 역도연맹 회장 등과 격의 없는 친구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곧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제24회 올림픽대회를 서울로 유치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으며, 이어 서울올림픽에 동구권이 참가하도록 유도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역도국제심판 1급 자격으로 몬트리올올림픽대회·모스크바올림픽대회·세계선수권대회·주니어선수권대회·아시아대회 등 국제대회에서 심판원 및 배심원으로 활약하였다. 아시아보디빌딩연맹에도 한국측 대표로 관여했으며, 1979년 이 연맹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대한체육회 감사로 선임되어 2년간 역임하였다. 한편, 1974년 테헤란아시아경기대회 때는 북한 역도선수 김중일의 약물 복용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1980년 제12회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를 서울로 유치하는 데 기여하였고, 대회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도 활약하였다. 세계역도연맹은 창설 100주년을 맞은 1980년 5월 근로은상을 수여했으며, 정부는 1978년 대한민국체육상 공로상과 1982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하였다. 대한역도연맹은 1984년 그의 헌신적인 봉사를 기리는 추모비를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보통리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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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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