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본조선무산청년회

  • 역사
  • 단체
  • 일제강점기
1920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되었던 조선 무산자계급출신단체.
이칭
  • 이칭재일본무산자청년동맹회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현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20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되었던 조선 무산자계급출신단체.

내용

1920년 5월 15일 당시 조선인 유학생이었던 전진한(錢鎭漢)·박렬(朴烈)·오성식(吳成軾)·김말수(金末守)·조진봉(曺鎭鳳) 등 20여 명이 일본·중국의 무산자계급과 제휴하여 권익옹호와 공산사회주의 이념전파를 위해 회를 조직하였다.

원래 ‘재일본무산자청년동맹회(在日本無産者靑年同盟會)’라고 불렸으나, 1925년 5월 하순경 ‘재일본조선무산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초창기에는 일본인과 중국인도 가담하였으나, 점차 1924년경부터 조선인만의 모임으로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27년 5월 협동조합의 결성 허가를 일본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대중집회를 열고 규탄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저지로 대중집회를 뜻대로 진행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무산자계급의 권익옹호와 민족차별철폐, 식민지정책의 완화, 대중경제의 실시 등 20여 개의 구호를 적은 전단(傳單)을 제작, 배포하여 가두 선전을 벌였다.

이어 이들은 오사카(大阪)·나라(奈良)·나고야(名古屋) 등 10여 곳에 지부를 설치하고, 일본 정부에 권익옹호와 사회운동을 위한 기반 조성에 열성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들의 주장과 행동이 점차 과격해지고, 이른바 치안에 중대 위협을 준다는 구실로 회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동요됨이 없이 계속해서 대중과의 연계투쟁을 전개하였고, 이에 일본 정부는 1932년 5월 31일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 해산시키고, 회의 본·지부를 강제로 봉쇄하였다. 그 뒤 회는 활동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 - 『한민족광복투쟁사』(이현희, 정음문화사, 1990)

  • - 『朝鮮獨立運動-社會主義運動篇-』(金正明 編, 原書房, 1967·1968)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