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기 왕경(王京)을 지키는 핵심적 군대인 이른바 9서당(九誓幢)의 한 부대로, 686년(신문왕 6)에 벽금서당(碧衿誓幢)과 함께 보덕성(報德城 : 지금의 익산 소재)의 고구려 유민으로써 편성하였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에 의하여 보덕왕(報德王)에 봉하여진 부흥운동군의 우두머리 안승(安勝)을 따라서 금마저(金馬渚)에서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이후 684년 11월 안승의 족자(族子)인 장군 대문(大文)이 일으킨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남쪽 주군(州郡)에 옮겨 살았는데, 2년 뒤인 686년 9서당에 편입되었다.
소속군관으로서는 최고지휘관인 장군 2인을 비롯하여 대관대감(大官大監) 4인, 대대감(隊大監) 5인(그 중 보병을 지휘하는 자가 2인, 기병을 지휘하는 자가 3인), 제감(弟監) 4인, 감사지(監舍知) 1인, 소감(少監) 23인(그 중 보병을 지휘하는 자가 4인, 기병을 지휘하는 자가 6인, 나머지는 알 수 없음), 대척(大尺) 23인(그 중 10인은 대관에 속하고, 보병을 지휘하는 자가 4인, 기병을 지휘하는 자가 6인), 군사당주(軍師幢主) 1인, 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인, 보기당주(步騎幢主) 4인, 착금기당주(著衿騎幢主) 18인,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20인, 군사감(軍師監) 2인, 대장대감(大匠大監) 1인, 보기감(步騎監) 4인, 착금감(著衿監) 18인을 두었다. 금(衿)의 빛깔은 적흑(赤黑)이었다. → 구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