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따르면,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犾鈇)는 어려서 머리를 깎이고 목에 칼을 씌우는 형벌을 받았던 죄인이었다고 한다. 또한, 교묘한 말로 죄를 용서받은 뒤 훗날 궁예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남을 헐뜯고 고소하는 말을 잘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많이 모함하였기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기록은 궁예 정권을 무너뜨린 왕건(王建) 정권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은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하고 있다. 일단 은부는 어릴 때 모종의 범죄에 연루되는 등 사회적 ·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처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그가 궁예의 심복인 내군장군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군사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인정받은 것이 계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군장군은 친위군을 이끌며 궁예의 신변 경호를 담당하였던 직위였다. 그런데 내군장군인 은부는 참소를 자행하여 자주 죄 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씌웠다고 한다. 은부가 한 참소나 모략이란 그가 정권 내부의 반역 움직임을 적발하는 일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하면서 부인 강(康)씨와 두 아들을 살해하고, 반대 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을 자주 벌이는 등 공포정치를 단행하였다. 내군장군 은부는 궁예의 휘하에서 이러한 숙청을 주도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918년 6월 왕건은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은 후 고려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후 일정 기간 민심의 안정에 주력하면서, 또 한편으로 과거에 궁예를 추종한 세력이나 왕건의 즉위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을 숙청하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특히, 이해에 마군(馬軍) 장군(將軍) 환선길(桓宣吉)의 역모 사건이 있었는데, 왕건은 차후에도 발생할지 모르는 이러한 모반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개경에 있던 궁예의 추종 세력을 하나둘씩 제거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은부가 왕건에 대해 반역 또는 반역 모의를 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그가 왕건에게 숙청을 당해 죽게 된 원인은 과거 궁예의 친위 세력으로서 전제 왕권 강화를 도왔던 전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왕건 측이 은부에게 회유하지 않고 바로 숙청을 단행한 것은 아마도 그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 방치할 경우에 훗날에 화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