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룡

  • 종교·철학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후기 영암군수, 울산부사, 영해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 백유(伯兪)
  • 영서(穎西)
인물/전통 인물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606년(선조 39)
  • 사망 연도1667년(현종 8)
  • 본관옥천(沃川)
  • 출생지미상
  • 주요 관직풍기군수|영암군수|울산부사|영해부사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동현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영서문집 미디어 정보

영서문집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후기 영암군수, 울산부사, 영해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백유(伯兪), 호는 영서(穎西). 아버지는 전대승(全大承)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부호군 박운(朴雲)의 딸이다. 유년 시절에 작은아버지 전중승(全仲承)에게 배웠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3년(인조 1) 증광문과에 급제, 162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30년 성균관학정 겸 봉상시봉사에 임명되었다. 2년 후 성균관박사 겸 양현고직장 및 성균관전적·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33년 예조좌랑으로 춘추관에 재직하면서 소신 있는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사직을 청원하였으나 흥덕현감에 임명되었다.

이 때 청렴결백한 태도와 위민정책(爲民政策)을 실시해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전명룡의 선치를 찬양하였다. 어사 심동구(沈東龜)가 전명룡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 임금으로부터 의복 한 벌을 하사받았다.

1640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1643년 경성판관으로 부임, 낙후된 교육을 일신시켰다. 1647년 평양서윤, 1650년(효종 1) 흥양현감, 1654년 자인현감, 1659년 풍기군수·영암군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암에 재직하면서 흉년이 들자 부족한 진곡(賑穀)을 대동미(大同米)로 변통, 구제 대책을 강구했으나 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 뒤 1662년(현종 3) 울산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65년 영해부사로 재임 중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접수된 부의금을 관비에 충당시키기도 하였다. 만년에 대사헌·대사간 등에 부름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일생동안 검소한 생활 철학을 굳게 지켜, 전명룡이 죽었을 때에는 장례를 치를 살림마저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친우들의 도움으로 치렀다. 저서로는 『영서집(穎西集)』 4권 2책이 있다.

참고문헌

  • - 『영서집(穎西集)』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