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후기 영암군수, 울산부사, 영해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 때 청렴결백한 태도와 위민정책(爲民政策)을 실시해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전명룡의 선치를 찬양하였다. 어사 심동구(沈東龜)가 전명룡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 임금으로부터 의복 한 벌을 하사받았다.
1640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1643년 경성판관으로 부임, 낙후된 교육을 일신시켰다. 1647년 평양서윤, 1650년(효종 1) 흥양현감, 1654년 자인현감, 1659년 풍기군수·영암군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암에 재직하면서 흉년이 들자 부족한 진곡(賑穀)을 대동미(大同米)로 변통, 구제 대책을 강구했으나 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 뒤 1662년(현종 3) 울산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65년 영해부사로 재임 중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접수된 부의금을 관비에 충당시키기도 하였다. 만년에 대사헌·대사간 등에 부름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일생동안 검소한 생활 철학을 굳게 지켜, 전명룡이 죽었을 때에는 장례를 치를 살림마저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친우들의 도움으로 치렀다. 저서로는 『영서집(穎西集)』 4권 2책이 있다.
참고문헌
- 『영서집(穎西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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