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세조∼중종 때 문신(文臣)이며 청백리로 이름난 김양진(金楊震)을 추모하기 위하여 16세기에 그의 후손들이 세웠다고 전한다.
재사는 일곽내에 주사(廚舍)와 함께 조성되어 있어 흥미롭고, 주사와 재실의 배치가 원칙적으로 ㅁ자형이나 재실의 좌향을 주사와 달리하고 있어서 ㅁ자형이 변형되어 있다. 다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을 지녔다. 주사는 살림집형이며, 외양간과 뒤주까지 갖추고 있다. 위토의 소출이 상당한 양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사의 보편적인 간살이는 영조척(營造尺) 8○2척(약2.45m)의 전형적인 설정이어서 중기의 성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가전(家傳)하는 바가 없어 절대연대를 알 수 없으나 사용된 척도로 보아 후기보다는 중기에 해당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대지재사는 동향하였고, 산자락에 자리잡으면 상하의 기단을 구축하여 제법 높게 앉아서 주사 지붕 너머로 내다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려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인데, 중앙 6칸이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고 좌우 툇간에 구들을 들인 온돌방이 설비되었다.
가구(架構)는 오량이며, 천장은 연등이다. 이 건물에서의 특징은 뒷벽의 바라지창처럼 앞쪽에도 개폐할 수 있는 판재로 설치한 시설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닌 점이 주목된다. 사당은 단칸이나 주간이 넓어서 훤출해 보인다.
낮은 담장에 사주문(四柱門)이 자그마하게 시설되었다. 이 건물을 지정조사한 사람은 대지재사 대들보 위의 파련대공이 고운사(孤雲寺) 가운루(駕雲樓)와 유사하므로 조선 중기 건물로 편년해도 좋겠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