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천안(天安). 아버지는 전용(全蓉)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고 1627년(인조 5) 구성부사로서 좌영장을 겸하였다.
이 때 건주(建州)의 야인이 침입하여 안주성을 포위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 안주목사 김준(金浚)과 더불어 야인의 격퇴를 위하여 안주성의 백상루(百祥樓) 밑에 군졸로 포진하였다.
이 때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옴에 일시에 적을 공격하니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야인이 크게 패하여 일시 후퇴하였다가 전열을 가다듬어 대군으로 다시 침범함에 장병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으나, 진영이 적에게 함락되어 남이흥과 김준이 전사하였다.
더욱이, 군량이 고갈되고 원병이 오지 않자 전장병과 함께 죽기를 결의하고 누상에 올라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84년(숙종 10) 안주의 충민사(忠愍祠), 광주(光州)의 경렬사(景烈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