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길주 출신. 1910년 국권상실 후 가족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정국(李政國)·신대용(申大勇)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하기로 뜻을 모으고 만주·시베리아 각지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19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확대 개편하여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발족할 때 선전부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베리아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신보(韓人申報)』가 발간되자 총리 겸 기자로 있으면서 항일기사를 썼다.
러시아혁명군사령부 연해주 선전국장 포리소와 협의, 일본군대에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전단을 돌리다가 붙잡혔다. 4년형을 선고받고 청진에서 복역중 감옥에서 비밀결사 적유의용단(赤油義勇團)을 결성하고, 1923년 탈옥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공판장에서 “죄수도 또한 사람이라 자유가 귀하기는 고금(古今)이 없다. 그러므로 모두 그 피를 흘리고 그 몸이 부서져도 아까운 줄을 모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이 자유가 없으면 비록 살아 있어도 이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이 적게는 나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 크게는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분투한 이유이다.”라고 말하였다.
공판 후 5년간 경성에서 복역하였다. 1926년 만기출옥한 뒤 북간도 혼춘(琿春)으로 돌아가 일생동안 독립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