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조 승탑 중에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기본으로 하는 전형적인 승탑이다. 원래는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興法寺) 터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이 승탑의 주인공인 염거(廉居, ?∼844)화상은 도의(道義)선사의 제자이며,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에게 가르침을 전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2대 조사이다.
이 승탑은 1914년경에 서울 탑골공원으로 옮겨진 후 경복궁에 있던 옛 국립중앙박물관(현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있다가, 2005년용산에 새롭게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탑골공원으로 옮기기 전의 위치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일본인들이, “탑동공원내(塔洞公園內)로 옮겼다.”고만 하였고, 이후 원위치를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라고 기록하여 오늘까지 그렇게 전해지고 있으나, 수차의 현지답사와 동네 고로(古老)들로부터 옮겨질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은 바에 의하면, 확실한 근거는 없다.
흥법사지에서 서울로 옮겨온 것은 고려 초의 승탑인 진공대사탑(眞空大師塔)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염거화상탑이 옮겨진 사실을 현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으며, 이 승탑이 서 있던 자리도 없으므로 일본인들이 염거화상탑의 원위치를 흥법사지라고 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조작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흥법사 염거화상탑이라는 명칭은 일본인들이 임의로 부른 것으로, 이것을 광복 후에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근년에 이르러 이 승탑의 원소재지가 흥법사 터인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전(傳)’자를 앞에 붙이게 되었다.
이 승탑의 높이는 1.7m이고, 구조는 모든 부재의 평면이 8각으로서 기단부 위에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얹었으며,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한 형태이다. 본래 남아 있는 기단 아래에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 하나가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승탑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실상사 수철화상탑(보물, 1963년 지정)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형태는 크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현재의 기단부는 상대석 · 중대석 · 중대받침(하대석으로 보기도 함)으로 구성되었으며, 중대받침 각 측면에는 1좌씩의 사자상(獅子像)을 돋을새김하여 모두 8좌인데, 이들은 모두 동적인 자세이다. 상면에는 중대석을 받는 3단의 받침을 똑같은 높이와 형식으로 마련하였다.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각 면에 안상(眼象)을 오목새김하고 그 안에는 각기 연(輦) · 향로(香爐) · 화문(花文) 등을 조각하였는데, 특히 연은 연좌와 보개(寶蓋) · 보주(寶珠) · 화문 등으로 장식되었다.
상대석은 아래에 8각으로 3단 받침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중대석 받침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측면은 원형을 이루었고, 여기에는 단엽의 앙련(仰蓮)을 이중으로 조각하였는데, 상 · 하열에 16판씩이고 연판 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형태는 풍려한 편이다. 상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원형으로 낮은 받침으로 1단 돌리고, 그 중앙에 8각으로 원호와 각형의 2단 받침을 마련하여 8각의 탑신굄대를 받치고 있다.
탑신굄돌은 딴 돌로 조성하여 끼운 것이며, 각 측면에 안상을 1구씩 오목새김하고, 그 내면에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천부상(天部像)을 1구씩 조각하였다. 측면 상단은 갑석형을 이루었으나 부연(副椽) 등의 받침단은 없으며, 상면에는 8각으로 원호와 각형의 2단 받침을 마련하여 8각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승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목조건축의 팔각당(八角堂)을 그대로 돌에 옮겨 좋은 듯, 이 부분에서는 목조가구(架構)의 형식을 많이 볼 수 있다. 각 면에 양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를 세우고 앞뒤에는 문비형(門扉形)을 새겼다. 문 안에는 자물쇠와 문고리 두 개를 돋을새김하였으며, 상부에는 양쪽에 굴곡이 있는 호형(弧形) 안을 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문비 양쪽에는 각기 사천왕상을 배치하였는데 매우 도드라지게 새겼으며, 각 상의 표현은 원형두광과 무기 · 갑주(甲胄) · 머리모양, 천의의 휘날리는 모습, 돌출된 대좌 등에서 매우 사실적이다. 탑신 면 양 우주 아래로 하방(下枋)을 돌리고, 상부에 인방(引枋)과 평창방(平昌枋)을 건너지르고 있음은 목조 건물의 벽면을 연상시킨다.
옥개석은 탑신 위에 놓이는 하면 부분에 낮은 1단의 받침을 조출하고, 호형을 이룬 처마 부분에는 비천상을 조각하였는데, 전면이 아니고 1면씩 건너 4면에만 배치하였다. 그리고 추녀에 이르는 하면에는 각형 서까래를 모각하였다. 옥개 상면은 8면의 합각에 굵은 우동형(隅棟形)을 표시하고, 낙수면에는 기왓골을 조각하였으며, 그 끝은 막새기와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각 우동 끝에는 원각(圓刻)한 잡상(雜像)을 배치하였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추녀는 거의 수평으로 모서리에 이르러 약간 곡선을 보이는데, 각 전각(轉角)에는 별다른 조각 장식이 없다. 이와 같이 옥개석의 서까래와 기왓골, 암막새기와형, 우동형의 모각과 잡상의 배치 등은 목조 건축을 충실하게 모방하고 있는 양식이라 하겠다. 옥개석 정면(頂面)에는 8각으로 높직한 1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상륜부를 받치게 되어 있으나, 현재는 상륜부재가 하나도 놓여 있지 않다.
이 승탑을 경복궁으로 옮기기 이전에 촬영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사진을 보면, 옥개석 정상에 3석의 상륜부재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복발(覆鉢) 1석과 보륜(寶輪) 2석으로 복발은 거의 공모양이며, 하단에 단엽의 앙련이 조식되고 중간에는 원좌화문(圓座花文)과 두 줄의 횡대(橫帶)를 돌려 표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보륜 2석은 같은 형태로서 8모서리에 귀꽃을 조각하였다. 이들은 현재 모두 행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석조승탑들의 상륜 고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승탑에 달려 있는 「금동제탑지(金銅製塔誌)」(크기 17.2㎝×28.8㎝, 국립춘천박물관)에 의하여 건조 연대를 844년경(문성왕 6)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탑지는 탑골공원에서 경복궁으로 옮길 때 발견되었다고 한다. 탑지에는, “會昌四年歲次甲子季秋之月兩旬九日遷化廉巨和尙塔去釋迦牟尼佛入涅槃一千八百四年矣 當比國慶膺大王之時(회창사년세차갑자계추지월양순구일천화염거화상탑거석가모니불입열반일천팔백사년의 당비국경응대왕지시)”라고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회창(會昌)은 당(唐) 무종(武宗)의 연호이며 경응(慶膺)은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갑자(甲子)는 문성왕 6년(844)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탑지가 나온 신라 승탑은 아직 없으며 대개가 탑비를 건립하고 있다. 그리고 명문 중에 ‘염거화상탑’이라고 지칭한 것과 ‘탑’의 용어가 보이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또한 이 승탑 형태에서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으로 이 탑은 탑신에 부조상이 등장하는 첫 예가 된다. 사천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神衆)으로 선사의 묘탑인 승탑에 사천왕이 표현된 것은 선사를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특히 가장 예술적으로 뛰어난 승탑이 많이 조성된 신라 말, 고려 초까지는 이 염거화상탑을 따라 대부분 탑신에 사천왕이 등장하고 있으며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인다. 이 승탑에서 보인 형태와 부조상들은 이후의 승탑들에 계승되었다.
이 승탑은 탑지로 인하여 건립연대가 확실해서 각 부의 양식과 조각이 다른 것을 비정(比定)할 수 있는 한 기준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승탑을 거점으로 하여 이후에 건조된 석조 승탑은 대부분이 염거화상탑의 형식을 따라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으로 두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