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훈련원도정 정봉수(鄭鳳壽)의 동생이다.
성품이 날쌔고 민첩하였으며 널리 경사(經史)에도 정통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형 봉수와 함께 용골성(龍骨城)에 들어가 반장(叛將) 장사준(張士俊)을 죽이고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예빈시주부에 이어 사도시판관이 되고, 영유현령(永柔縣令)으로 있을 때에 관곡(官穀)을 횡령한 죄로 1634년에 논핵을 받았다.
또 이 때 서북지방은 청나라와의 관계가 매우 긴박하였는데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은 청북(淸北: 청천강 이북)을 포기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의 적극 반대로 저지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순찰사 홍명구(洪命耉)의 협수장(協守將)이 되어 자모산성(慈母山城)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황해도 문화현령, 평안도 강서현령을 지냈다. 숙종 때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철산 충무사(忠武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