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5일에 이갑성(李甲成)·명제세(明濟世)·김성숙(金成淑)·박문희(朴文喜)·이극로(李克魯)·임화(林和) 등이 여러 비정치단체들을 중심으로 8·15광복 이후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정당·사회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서울 창신동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는 여운형(呂運亨)·송진우(宋鎭禹)·안재홍(安在鴻)·백관수(白寬洙)·허헌(許憲)·조동호(趙東祜)·김병로(金炳魯)·장덕수(張德秀)·최용달(崔容達)·이현상(李鉉相)·최근우(崔謹愚)·김형선(金炯善)·양근환(梁槿煥) 등 한국민주당·국민당·재건파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이 양근환의 주선으로 간담회를 갖게 되었다.
주요 의제는 ① 각 정치단체의 대동단결에 관한 문제, ② 초당적 자주독립촉진기관의 설립문제 등이었다.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각 당의 주요 간부들은 ①항에 대하여는 대체적으로 합의를 보았으나, ②항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이후의 회합부터는 당을 대표하여 나오기로 하였다.
제2차 회담은 10월 12일 한국민주당에서 김병로·장덕수(개인 자격), 국민당의 최석주(崔錫柱)·엄우룡(嚴雨龍), 건국동맹의 최근우·함봉석(咸鳳石), 재건파공산당의 이관술·김형선·안호욱(安好郁) 등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4개 정당 이외에도 문화·종교 단체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통일전선을 구성하기로 합의를 보고 제3차 회합에서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하였다.
1945년 10월 14일에는 천도교 대강당에서 43개의 정당 대표가 각 2명씩 참석하여 이갑성의 사회로 ‘정당통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0월 18일에는 한국민주당의 송진우, 국민당의 안재홍, 건국동맹의 여운형, 조선공산당의 박헌영(朴憲永) 등 4대 당 당수급 간담회를 알선하려고 하였으나, 임시정부를 부인하는 단체와 개인과는 어떠한 회합도 거부한다는 송진우의 고집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0월 19일 한국민주당의 원세훈(元世勳)·김약수(金若水), 국민당의 안재홍, 건국동맹의 여운형, 조선공산당의 이현상 등과 주최측의 이갑성이 회합을 갖고 앞으로 ‘민족적인 중대문제’에 한하여 공동행동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정당행동통일문제는 19일에 가진 정당통일위원회의 회합 이후 이승만(李承晩)의 환국으로 발족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넘어가 이 협의회를 통하여 통일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