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언제 처음으로 만들었는지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글자체와 그 재료에 의해 ‘정리자체철활자’라 하고, 그 활자로 찍은 책을 ‘정리자체철활자판’ 또는 ‘정리자체철활자본’으로 일컫는다.
1798년(정조 22) 인출(印出)의 ≪정묘거의록 丁卯擧義錄≫을 비롯하여 순조 초기의 인본은 초기의 인본인 듯 인쇄가 매우 정교하다.
이 활자는 순조 이후 한말에 이르기까지 호남지방을 비롯한 서울지방 등에서 문집·족보·전기류 등 각계각층에서 필요로 하는 책을 찍어 주었으며, 그 중에는 인쇄 의뢰자의 요구에 따라 ‘그곳에서의 간인(刊印:출판물을 인쇄함)임’을 표시한 것도 들어 있다.
1872년(고종 9) 9월 성균관의 비천당(丕闡堂)에서는 이 활자로 ≪태학갱재축 太學賡載軸≫을 찍고 ‘비천당간인’의 인기를 표시하였으며, 1874년(고종 11) 서울의 갑계소(甲稧所)에서는 ≪갑술계 甲戌稧≫를 인출하고 그곳의 활인(活印)임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1876년 봄 전주의 희현당(希顯堂)에서는 김시걸(金時傑)의 ≪난곡선생연보 蘭谷先生年譜≫를 찍어 내고 그곳에서 활인했음을 또한 발문에 표시하였는데, 이 마지막의 기록만을 보고 활자 이름을 ‘희현당자’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희현당은 김시걸이 1699년(숙종 25)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영름(營廩)으로 전주에 터를 구입하여 글방을 세우고 이름 붙인 것인데, 여기서 그 후손 김계진(金啓鎭)이 1876년에 이 활자를 구하여 연보를 찍어냈던 것이다.
이것도 위의 ‘비천당간인’과 그 성격이 같은 것이며, 민간의 상업적 인쇄의 특징에 해당한다. 이 활자는 필서체철활자와 더불어 민간인쇄를 촉진시켜 준 점에서 인쇄문화사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