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9m. 석탑은 정암사 적멸보궁(寂滅寶宮)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평평한 대지를 만들고서 석탑을 세웠다. 벽돌처럼 돌을 다듬어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바닥돌은 모를 죽인 화강암 석재를 6단으로 쌓아 올려 구성하였는데, 맨 윗부분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2단의 굄을 또 다시 마련하였다. 몸돌을 구성하는 돌은 회녹색의 수성암질석회암을 길이 30∼40㎝, 두께 5∼7㎝의 크기로 다듬은 것인데, 다듬은 수법이 정밀하여 돌의 표면이 깔끔하게 잘 정돈되었으므로, 얼른 보아서는 마치 실제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몸돌은 너비가 1.78m이고 높이가 1.03m로, 단면이 네모나게 15단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남쪽면 가운데에는 화강암으로 네모난 틀을 짜서 만든 감형(龕形)이 설치되어 있다. 문비(門扉)는 1장의 널돌로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세로 줄을 돋을새김하여 2짝의 문을 나타내었고, 문의 중심부에는 철로 만든 문고리를 달았다.
지붕돌은 전탑 특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추녀는 수평을 이루고 있지만 좁은 편이며, 전각(轉角)에는 위아래에 풍령(風鈴)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현재 윗층 지붕돌의 일부에는 풍경이 남아 있다. 밑면 받침은 1층이 7단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1단씩 줄어서 7층은 1단이다. 윗면인 낙수면의 층단도 1층은 9단이지만, 역시 위로 올라갈수록 1단씩 줄어서 7층은 3단이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노반(露盤) 위에 벽돌처럼 깎은 2장의 돌이 얹혀 있고, 다시 그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상륜이 설치되었다. 청동제 상륜은 꽃 무늬를 뚫새김으로 새긴 오륜탑(五輪塔)을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를 줄여 올려 놓고서, 그 위에 복발(覆鉢) 모양을 두었으며, 보륜(寶輪) 위에는 병(甁) 모양을 얹었는데, 병의 목에서 네 가닥으로 돌출된 끝부분에는 풍경이 달려 있다. 맨 꼭대기에는 윗부분이 바깥쪽으로 크게 굽은 수연(水煙) 모양을 올렸고, 병의 목에서 나온 쇠로 만든 자물쇠인 철쇄(鐵鎖)는 4층 지붕돌까지 연결되었다.
이 석탑은 규모가 거대한 편은 아니지만 형태와 조성 수법이 정교하다. 지붕돌 귀퉁이의 밑면이 위로 치솟은 것은 건립 시기의 양식을 잃지 않은 것이고, 청동제 상륜의 뚫새김 수법 또한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석탑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는데, 조각된 연꽃 무늬나 안상(眼象) 무늬 등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석탑은 오래 전부터 각 층의 돌이 없어지거나 파손되어, 1964년부터 보수 문제가 논의되다가, 1972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3층 지붕돌~받침돌 사이에서 5개의 탑지석(塔誌石)이 발견되었고, 받침돌 맨 아래부분 밑의 적심부에서는 청동합(靑銅盒), 은제외합(銀製外盒), 금제외합(金製外盒) 등으로 구성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서 이 석탑이 조선시대 말기까지 여러 차례의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지석에 의하면, 현재의 석탑은 1653년(효종 4)에 중건되었다고 보여진다. 다만 석탑 앞의 배례석이나 정암사에 전하는 여러 유물을 비교하면, 이 석탑이 처음 건립된 시기는 늦어도 고려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