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여칠(汝七).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현감(縣監) 정재범(鄭在範)이며, 어머니는 나주임씨(羅州林氏) 임병조(林炳祖)의 딸이다. 백부인 감역(監役) 정재행(鄭在行)에게 입양되었다.
1883년(고종 20) 천거로 동몽교관(童夢敎官)이 되고, 1886년 한성부주부(漢城府主簿)가 되었다. 1894년 동학난이 일어나자 두동(杜洞)으로 들어가 살면서 어려운 친척들에게 토지를 떼어주고 동리의 어려운 자들을 모두 도와주니 목비(木碑)와 석비(石碑)가 많이 세워졌다.
관찰사(觀察使)와 어사(御史)가 포계(褒啓)하였고, 이듬해 홍능(洪陵)의 역사에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진전감동관(眞殿監董官)에 임명되었으나 또 나가지 않았다. 1897년 이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비서원비서승(秘書院秘書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고, 1901년 충북관찰사(忠北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민영환(閔泳煥)은 국가가 좋은 사람을 등용했다고 정태현의 등용을 기뻐했다.
취임 후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하고 이이(李珥)의 규례(規例)를 참작하여 도향약(道鄕約)을 만들었는데 얼마 안되어 면소(面所)에까지 시행되었다. 백성들은 생사당(生祠堂)을 세우려 하였고, 임금은 그의 공평정대하고 용왕매진(勇往邁進)하는 것을 크게 칭찬했다.
1905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뒤에 벼슬에서 물러나 도숭산(道崇山) 남쪽에 숭산정사(崇山精舍)를 세우고 책을 구입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정태현이 죽은 후 유림들에 의해 향교장(鄕校葬)을 거행했으며 숭양정(崇陽亭)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죽헌집(竹軒集)』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