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경식(敬植). 성주목사 제말(諸沫)의 6세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운총만호(雲寵萬戶)가 되어 군기(軍器)를 수리하는 등 군비에 만전을 기하였으며, 해서우후(海西虞候)가 되어 군비를 쇄신할 때 군민(軍民)의 폐를 끼치지 않았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관서절도영(關西節度營)의 청북소모장(淸北召募將)이 되어 절도사 이해우(李海愚)의 휘하병 200명을 인솔, 청천강을 건너가 많은 군병을 모집하였다.
정주에 이르러 현인복(玄仁福)과 더불어 선봉이 되어 정주성 남문을 포격하는 한편, 큰 도끼를 들고 성문을 찍어 성문이 거의 떨어지게 되었으나, 적이 일제히 포를 쏘며 시석(矢石)을 퍼붓자 관군이 모두 달아나게 되었다.
이 모습을 보고 관군의 기율이 해이한 것을 개탄하면서 되돌아와, 신도진수군첨절제사 겸 방어장(薪島鎭水軍僉節制使兼防禦將)에 임명되어 다시 선봉으로 남문에 육박하였을 때, 홍경래군의 일제사격으로 전사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추증되고, 난이 평정된 날에 칠의사사(七義士祠)의 단을 쌓아 제사지내졌으며, 정주의 오봉산(五峯山)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제향되었다. 이 때 현판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